 |  | | | ↑↑ 한주식 지산그룹 회장 | | ⓒ CBN뉴스 - 경주 | [지산그룹회장, 명예 경영학 박사 한주식] 공장을 하나 지어 삼십 년을 굴려 보면, 회계장부가 정직하게 말해 주는 것이 있다. 처음 큰돈을 들인 건물과 기계는 해마다 조금씩 값이 깎여 나가고, 언젠가는 장부에서 거의 영(零)에 수렴한다.
감가상각이라는 이름의 이 조용한 마모는 예외가 없다. 지붕도 낡고, 설비도 낡고, 한때 최신이라 자랑하던 라인도 낡는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낡아 사라진 자리에서, 끝까지 값이 깎이지 않고 오히려 조용히 불어나 있는 것이 하나 있다. 그 밑에 깔린 땅이다.
나는 오래전, 남들이 거들떠보지 않던 땅을 즐겨 샀다. 머리 위로 큰 선이 지나가거나, 무슨 사연이 붙어 값이 깎인 땅이었다. 사람들은 그 흠을 보고 값을 매겼지만, 나는 그 흠이 지상에 있을 뿐 땅 자체를 갉아먹지는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세월이 지나 건물과 사연은 낡고 잊혔어도 땅은 그대로 남았고, 남은 것은 결국 올랐다. 낡는 것에 값을 치르면 시간이 내 편이 아니고, 남는 것에 값을 치르면 시간이 내 편이 된다. 나는 그 단순한 사실 하나로 사십 년을 버텼다.
젊은 시절 전화 가입권도 그랬다. 작은 보증금을 걸고 몇 해를 기다렸다. 내가 산 것은 전화기가 아니라, 아무나 가질 수 없는 '연결될 권리'였다. 전화기는 낡아 버려지지만 그 권리는 귀했다. 돌아보면 내 평생의 장사는 늘 같은 모양이었다. 낡아 없어질 물건이 아니라, 시간이 갈수록 남이 갖지 못하는 권리를 산 것이다.
그런데 요즘, 그 이치가 한 겹 더 깊어지는 것을 본다. 예전에는 '땅' 그 자체가 남는 것이었다면, 이제는 땅 위가 아니라 땅에 무엇이 꽂혀 있느냐가 값을 가른다. 같은 넓이의 땅이라도 거기에 큰 힘을 끌어올 선이 닿아 있는가, 물이 들어오는가, 지어도 좋다는 허가가 붙어 있는가, 그리고 그것을 필요로 하는 수요처와 얼마나 가까운가. 흙은 어디에나 있지만 그 위에 얹힌 이 권리들은 아무 데나 있지 않다. 국토는 좁고 큰 부지를 원하는 산업은 늘어나는 나라에서, 넓으면서 힘까지 갖춘 한 뙈기는 해마다 더 귀해진다. 규모가 클수록 그것을 대신할 땅이 세상에 몇 없어지고, 없어질수록 값의 차이는 벌어진다.
다만 오래 해 보니 한 가지는 분명하다. 크다고 다 귀한 것은 아니다. 힘도 물도 허가도 닿지 않은 넓은 땅은, 남는 것이 아니라 그저 세금과 이자가 갉아먹는 부담이다. 감가상각이 남긴 땅이 귀한 것은, 그동안 그 땅이 스스로 벌어 제 몸값을 지켜냈기 때문이다. 세를 놓아 들어오는 돈이 이자와 세금을 덮어 주는 땅만이 시간을 견딘다. 벌지 못하는 땅은 아무리 넓어도 시간이 적이 된다. 그래서 나는 늘, 사더라도 그 땅이 스스로 밥값을 하는지부터 보았다.
부동산에는 오르고 내리는 물결이 있다. 어느 해는 아파트가, 어느 해는 상가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다. 그 물결을 좇는 이는 늘 한 발 늦는다. 나는 물결이 아니라, 물이 다 빠진 뒤에도 바닥에 남아 있는 것을 사려고 했다. 낡는 것과 남는 것을 가려내는 눈 — 장사에서 내가 배운 것은 결국 그 하나였다.
무엇이 낡아 없어질지, 무엇이 끝까지 남아 귀해질지. 그것만 틀리지 않으면, 나머지는 시간이 알아서 해 주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