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한주식 지산그룹 회장 | | ⓒ CBN뉴스 - 경주 | [지산그룹회장, 명예 경영학 박사 한주식] 돈은 누가 먹이나, 소는 누가 먹이나. 시대마다 그 답이 달랐다. 세상이 한 번 바뀔 때마다, 동네에서 가장 잘사는 집도 바뀌었다.
내가 어릴 적 우리 동네에서 제일가는 부잣집은 양조장이었다. 술을 빚어 파니 늘 돈이 돌았고, 인심도 그 집에서 났다. 술을 거르고 남은 지게미조차 귀했다. 양조장 집 아들이 내 친구였는데, 가난한 아이들은 그 지게미를 얻어먹고 배를 채웠다. 지게미를 먹고 자란 친구 하나는 자라서 술꾼이 되었는데, 지금도 그때가 행복했다고 한다. 부(富)의 중심에서는 그렇게, 버리는 것마저 누군가를 먹여 살렸다.
다음 시대의 부잣집은 목욕탕이었다. 집집마다 더운물이 없던 시절, 부잣집도 목욕만은 읍내 목욕탕까지 걸어가서 했다. 물을 데워 놓고 앉아서 돈을 버는 집, 그것이 목욕탕이었다. 그다음은 극장이었다. 필름 한 벌을 돌리고 돌려주며 돈을 받던 시절, 큰 극장을 가진 사람이 돈을 벌었다.
거리에 자동차가 다니기 시작하자 판이 또 바뀌었다. 차는 기름을 먹어야 했고, 주유소가 생겼다. 그 무렵 전화도 보급되었는데, 전화 있는 집이 곧 부잣집이었다. 손잡이를 힘껏 돌려야 겨우 연결되는 전화라, 기운 없는 노인이나 여자는 걸기조차 어려웠다. 자동차도 시동을 걸려면 크랭크를 온 힘으로 돌려야 했다. 그 힘든 시절, 앉아서 기름만 넣어 주면 되는 주유소는 신선놀음 같은 꿈의 직업이었다.
세월은 사람의 몸까지 바꾸었다. 고기를 실컷 먹게 되니 살이 쪘고, 살을 빼려는 사람들이 몰린 곳이 찜질방이었다. 숯불을 쬐고 땀을 쏟으면 살이 빠진다 하여, 한때 찜질방은 옛 목욕탕보다 훨씬 많이 벌었다. 그러나 그 호황도 오래가지 않아 하나둘 문을 닫았다. 실내 낚시터니 무엇이니, 한 시절을 풍미하다 사라진 업들이 그 사이에 숱하게 있었다. 부잣집의 간판은 늘 그렇게 갈렸다.
이윽고 세상은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넘어갔다. 예전엔 이마트와 홈플러스 같은 큰 마트가 길목의 돈을 쓸어 담았지만, 이제는 쿠팡과 마켓컬리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물건을 매장에 쌓는 대신 창고에 쌓아 두었다가 소비자에게 곧장 배달하는 방식, 그래서 생겨난 것이 물류창고다. 오늘날 온라인 장사의 뼈대가 바로 그 창고다.
그리고 지금, 모든 산업이 반도체로 빨려 들어간다. 절반이 넘는 돈이 그 작은 칩 하나로 모인다. 나 같은 창고 하는 사람은 여기서 한 걸음을 더 내디딘다. 실물을 넣고 꺼내던 창고를, 정보를 넣고 꺼내는 창고로 바꾸는 것이다. 그것이 데이터센터다. 창고에는 물건이 들어가고, 데이터센터에는 정보가 들어간다. 시대의 창고가 바뀌었을 뿐, 하는 일은 같다.
여기에 재미있는 역설이 하나 있다. 이 정보의 창고는 전기를 먹고 산다. 그런데 정작 전기를 파는 한전은 밑지고, 그 전기를 끌어다 쓴 사람은 돈을 번다. 귀한 것을 쥔 쪽이 늘 버는 게 아니라, 그 귀한 것을 잘 쓰는 쪽이 번다. 부는 언제나 그렇게, 자원 자체가 아니라 자원을 엮는 손으로 흘렀다.
그렇다면 왜 하필 한국인가. 나는 그 뿌리를 오래전에서 본다. 박정희 시절, 전기는 한전이 도맡고 철도는 철도청이 도맡았다. 전압은 이백이십 볼트로, 주파수는 육십 헤르츠로 전국을 하나로 맞추었다. 그 시절 민주주의에 드리운 그늘을 나는 잊지 않는다. 다만 경제만 떼어 놓고 보면, 그렇게 하나로 통일해 둔 전기가 오늘의 우리를 먹여 살리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반도체도 데이터센터도 결국 전기를 먹는 산업이다. 온 나라의 전기를 일찌감치 하나의 규격으로 키워 둔 그 유산 위에서, 우리는 남보다 앞서 달릴 수 있었다.
앞으로는 무엇이 부잣집이 될까. 지금은 데이터센터가 그 정점에 있지만, 정점은 늘 옮겨간다. 나는 그 데이터센터와 반도체를 먹여 살릴 부자재와 소부장이 다음 한 겹이 되리라 본다. 자동차도 전기로 바뀌고 스스로 달리게 되면, 그 자율주행에 드는 비용은 늘겠지만 매연은 줄고 기름은 덜 쓰게 된다. 석유의 몇 분의 일 값인 전기로 세상이 움직이면, 우리는 기름의 압박에서 벗어나 한 단계 더 올라설 것이다. 돌아보면 그 실마리도 또 전기다.
결론은 단순하다. 세상은 늘 바뀌고, 그때마다 부잣집도 바뀐다. 양조장에서 목욕탕으로, 극장에서 주유소로, 마트에서 창고로, 창고에서 데이터센터로. 옛 간판을 붙들고 앉아 있으면 시대가 지나간다. 고집을 부릴 일이 아니다. 지금 사는 사람이 해야 할 일은, 다음에 무엇이 자랄지를 먼저 읽고 그쪽에 서는 것이다. 돈은, 소는, 시대마다 다른 사람이 먹인다. 다만 그다음을 내다본 사람이, 늘 그 시대의 부잣집이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