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한주식 지산그룹 회장 | | ⓒ CBN뉴스 - 경주 | [지산그룹회장, 명예 경영학 박사 한주식] 마흔 해 전, 나는 유리를 상자에 담아 팔았다. 그 시절 유리는 귀했다. 압록강 건너 북녘에는 집을 다 지어 놓고도 유리를 끼우지 못해 십 년을 빈 창틀로 둔 집이 있다고 했는데, 우리 형편도 그리 멀지 않았다. 유리값이 워낙 비싸 집 한 채에서 차지하는 몫이 만만치 않던 때다.
그런데 사람들은 집을 지을 때 창문 규격을 먼저 정했다. 창을 짜 놓고 거기에 유리를 맞춰 끼웠다. 창이 한 치만 커도 한 단계 위 규격의 유리를 써야 했고, 그러면 유리값이 곱절로 뛰었다. 잘려 나가 버려지는 자투리도 그만큼 늘었다. 나는 거꾸로 했다. 유리에 창을 맞췄다. 규격대로 나온 유리를 자르지 않고 그대로 쓸 수 있도록 창틀을 유리 치수에 맞춰 짰다. 자를 일이 없으니 자투리가 없고, 자르는 품도 들지 않았다. 같은 집을 짓는데 유리값이 눈에 띄게 줄었다.
작은 이야기 같지만, 나는 거기서 평생 써먹은 한 가지를 배웠다. 세상이 정해 놓은 규격에 내 비용을 맞추지 말고, 거저 주어진 규격에 내 설계를 맞추라는 것. 표준을 따르는 사람은 그 표준값을 치르고, 표준을 거꾸로 세우는 사람은 남이 치르는 그 값을 아낀다.
나무도 그랬다. 거실 높이가 여덟 자, 이백사십 센티미터 남짓이다. 여덟 자에 못 미치는 나무는 '단척'이라 하여 반값이다. 나는 이삼 센티 모자란 단척을 반값에 사다 벽에 붙였다. 밑에 빈자리가 생기면 거기에 좋은 나무로 걸레받이를 넓게 둘렀다. 그러면 그 틈이 가려질 뿐 아니라, 보는 사람은 "자재를 아끼지 않고 좋은 나무를 넉넉히 썼구나" 하며 오히려 고급으로 친다. 반값 자재로 지은 집이 비싼 집으로 보인다. 시멘트도 부대로 사지 않고 벌크로 받았다. 포장이 없으니 포장값이 빠지고, 뜯는 품도, 버리는 비용도 사라진다.
이쯤 되면 사람들은 내가 유난히 아끼는 사람이라 여긴다. 그러나 아끼는 것과 이것은 다르다. 아끼는 사람은 같은 물건을 깎아 산다. 흥정이다. 나는 비용이 생겨날 자리 자체를 없앤다. 설계다. 흥정은 상대가 있어야 하고 한 번 쓰면 끝나지만, 설계는 상대가 없어도 되고 모든 일에 두고두고 되풀이된다. 데이터센터를 짓는 지금도 그렇다. 설계도 직접 그리고, 자재도 우리가 만들고, 건설 장비도 사다 쓰지 않고 우리 것으로 돌린다. 그러니 건축까지 남보다 삼 할이 절감된다. 돈을 아껴 줄어든 것이 아니라, 구조가 그렇게 짜여 줄어든 것이다.
이 눈으로 세상을 보면 땅도 달리 보인다. 사람들은 송전탑이 선 땅, 송전선이 머리 위로 지나는 땅을 꺼린다. 흉하다며 값을 깎는다. 그런데 흉하다는 그 결함이 내가 하려는 일과 아무 상관이 없다면, 그것은 손해가 아니라 할인이다. 아니, 할인 그 이상이다. 남들이 꺼려 달아나 주니 나는 경쟁자 없는 자리에서 살 수 있다. 값을 깎아 줄 뿐 아니라, 살 사람을 쫓아내 주는 셈이다.
우리 진천 공장에는 철탑이 셋 서 있고 송전선이 여러 가닥 머리 위로 지난다. 그 아래에서 우리는 물건을 만든다. 민원이 없다. 시끄럽다, 냄새난다 다투는 이웃이 없으니 동네 사람들이 오히려 공장을 반긴다. 깨끗한 동네 곁에 선 공장은 장부에 잡히지 않는 빚을 지고 출발한다.
언젠가 들어올 민원, 조업 정지, 증설 거부 같은 것들이다. 철탑 아래 땅은 그 빚이 이미 청산된 땅이다. 싫어할 사람은 떠났고, 남은 사람은 산업을 반긴다. 한 번 싸게 사고, 두 번째로 그 보이지 않는 위험까지 면제받는다.
세월이 흐르자 부호가 뒤집혔다. 전기가 귀해지고, 그 전기를 한꺼번에 삼키는 데이터센터라는 것이 들어서면서, 송전선 아래라 아무도 사지 않던 땅을 사람들이 찾기 시작했다. 일반 용지의 삼분의 일 값에 사 둔 땅이 지금은 일반 용지보다 도리어 세 배가 비싸다. 백 원에 사 둔 것을 천 원으로 쳐주는 셈이다. 돌아보면 내가 한 일은 흉한 땅을 사들이는 배짱이 아니었다.
그런 배짱이라면 물이 자주 차는 땅도 샀어야 했다. 물은 데이터센터에 치명상이니, 그런 땅은 아무리 싸도 사지 않았다. 내가 고른 것은 '내 쓰임에는 흠이 되지 않는 흠'이었다. 남에게는 마이너스이나 나에게는 플러스로 돌아설, 부호가 언젠가 뒤집힐 결함이었다. 솔직히 그 부호가 언제 뒤집힐지를 맞힌 것이 운이었는지 눈이었는지 나도 다 알지는 못한다. 다만 전기는 귀해질 것이라 믿었고, 값이 쌌으니 틀려도 잃을 것이 적었다.
사업의 답은 늘 남들이 좋다고 몰려가는 곳이 아니라, 남들이 고개를 젓고 돌아선 자리에 있었다. 거기에는 경쟁이 없고, 값이 싸고, 부호가 뒤집힐 여백이 있다. 철탑 아래의 땅, 단척 유리 한 장, 부대를 벗긴 시멘트 — 내가 평생 배운 것은 결국 하나다. 세상이 버린 규격을 거꾸로 집어 드는 사람에게, 세상은 언젠가 그 값을 치러 준다. |